청동시 시대 무속
청동기 시대 지배층의 무덤에서 제사 지내는 데 쓰이던 청동 거울이나 방울이 발견되는 것도 모두 당시 지배층이 무당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지배층의 무덤들을 보면은 지배층 무덤 속에 거울이라든지. 방울이라든지. 칼이라 든 지하는 오늘날 무당들이 많이 쓰고 있는 무속 도구들이 무덤 속에 부장품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분들도 사회적 역할이 무당과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제사장과 정치적 수장이 동일 인물이었던 삼국시대 이전과는 달리 삼국시대에는 전문적인 사제나 무당이 종교적인 역할을 따로 담당하게 됩니다.
무속인의 역할
우리나라의 샤머니즘 행위 기록은 고대에서부터 있어 왔는데요. 삼국유사에 보면은 주몽 탄생 설화가 전부 다 강림 신앙이거든요. 강림 천신 신앙이란 말이죠. 이걸 우리가 바로 샤마니즘이 고대에서부터 있어 왔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철기 문화가 널리 퍼지면서 생산력이 높아지자 정치 세력들 사이에 전쟁이 자주 일어난 것이 배경이 되는데 전쟁으로 수장의 정치 군사적 역할이 커졌으며 종교적 역할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당은 왕의 전복가이자 자문관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왕이 노하면 자리에서 처형될 정도로 힘이 약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종교가 정치에 점차 예속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왕이 무당의 역할을 겸하는 무왕적인 성격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라에 남의 왕을 부를 때 쓰는 차차 옹이란 말은 무당을 뜻합니다. 그리고 신라의 왕들은 기후와 농사의 풍흉을 점치고 적병에 침입할 것을 이어 나기도 했습니다. 또 신라 시대에 보면 왕을 차차홍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차차홍이라는 말이 무당을 뜻한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왕을 부르는 말이나 무당을 뜻하는 말이 같은 의미였다는 거죠. 그럴 정도로 이 삼국시대나 고대 사회에 있어서는 이 무속이라고 하는 것이 큰 사회적 기능을 발휘했었습니다. 그러나 고려 시대가 되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국왕의 무왕적 성격이 쇠퇴하고 무의 정치적 의미도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불교와 무속
이제 불교가 들어오면서부터 무속의 위상 또 무당의 어떤 사회적 위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고요. 또 고려시대에 오면은 불교라든지 유교라든지 하는 것이 완전히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지도 이념 또 지배층의 종교가 됨에 따라서 무속은 기능이 점차 축소되고 위상이 점차 격화됩니다. 그래서 이제 고려시대부터 시작해서 무당에 대한 배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으로서의 무는 여전히 성행하였습니다. 치병과 악귀를 쫓는 9세도 무당들이 참여하게 되어 무속의 범위도 넓어졌다 이와 같은 기록을 보면 무당들이 기우제나 별기 은제를 지내던 전통이 그대로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시대의 무당은 결코 천한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상류 계층에서도 무당이 되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런 무당을 선관이라 불렀다 양반 출신으로 신대린 이를 뽑아 선관으로 삼고 불교 의식의 하나인 팔관회를 주관케 했습니다. 팔관회는 천녀 명산대첩 군신이 함께 즐기는 행사가 되었는데 고려 초 팔관회는 건국의 정통성 과시와 왕의 권위 제고에 크게 기여하는 중요 행사였습니다. 그러다 무속 신앙의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무속인의 사회적 입지
12세기 전반부터는 왕실과 민중 속에서 열렬히 신앙되던 무가 점차 유학자들의 강력한 비판을 받게 된 것 무는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미신이며 국가의 돈을 낭비하게 만든다는 무당의 사회적 지위도 하락이 되어 가지고요. 그전까지만 해도 왕족도 무당을 하고 있습니다만 주로 천민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무당을 하게 되고 또 무당에 대한 배척도 나오게 되면서 이 무속이 가진 입지는 점차 줄어들게 됩니다. 유학자들의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무신앙은 고려 말까지 계속 성행하였는데 공양왕 때 김자수의 상소문이 이를 뒷받침해 준 조선왕조는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삼고 불교와 무를 억압한 시대였습니다. 성리학 위주의 배타적이고도 독단적인 정신 풍토가 팽배했고 조선왕조실록을 위시하여 문집이나 법전유등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조선시대 들어오면은 조선이 인제 유교를 지도 이념으로 한 국가였습니다. 그래서 어 유교적인 각도에서 볼 때 이 무당이라는 것은 도대체 용납할 수 없는 그런 것이고. 그래서 그때는 주로 음사라는 말을 썼습니다. 올바르지 못한 제사다라고 해서 이 유학자들이 무당을 배척하고 부속을 이제 우리 문화 속에서 없애려고 하는 노력을 많이 했었습니다. 투자를 하고 순왕조는 개국 초부터 무와 불교의 억압에 나섰습니다. 특히 태종의 불교 탄압은 가혹하여 전국에 240개 중에서 4개만 남기고 모든 사찰을 폐지하였고 동시에 소속되어 있던 토지와 노비를 관에 몰수하였다. 아울러, 무당과 승려를 천민의 신분으로 규정해 버렸다 당시 천민은 온갖 사회적 천대의 대상이었습니다. 실제로 문화라는 것은 대번에 이렇게 바뀌지가 않습니다. 어떤 유교로서 해결할 수 없는 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전례적인 불교적인 것도 이어받게 되는 것이고. 실제로 무속을 탄압을 했지만, 무속을 탄압을 했지만, 인조 25년까지도 기우제를 지낼 때는 무당들을 동원했습니다. 국가에서 어떤 기우제와 같은 절박한 순간에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그런 큰 문제에 대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르지 않고 이형상이라는 사람이 1702년에 제주목사로 있으면서 제주도에 있는 129개의 신당과 5개의 사찰을 모두 불태우게 됩니다. 탐라순례도에 의하면 이 형상은 도내 각 마을에 산재해 있던 사당 129개소와 모든 무구들을 불태워버리고 1000명에 가까운 무당들을 모두 귀농시켜 더 이상 미신행위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조치했습니다. 유학자들이 무속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무의 금압에 마지막 양상인 무당의 축출돼 일어났 무당의 축출은 세종 때부터 시작되어 조선왕조 말까지 계속되었는데 대개 무당을 4대 문 밖으로 내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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