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대보름과 민속신앙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 위에 올린 소 떼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역할로 인간의 소원을 하늘에 닿게 해달라는 바람이 담겨 있다. 마을 입구에 차곡차곡 쌓여져 있는 돌탑 수금하기 돌탑이다. 장승과 마찬가지로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민속신앙의 의미가 퇴색되고 사라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전국이 엄청나게 많은 마을이 있지만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의 문화 우리의 문화를 만들어낸 핵이 마을입니다. 설 때에는 혈연 공동체 성씨끼리 결속을 시키고 정월 대번은 뭡니까? 정월대번은 뭐는 내 성씨가 안동근씨냐 안동 김씨냐 뭐 박씨냐가 안 중요합니다. 마을에 사는 주민 그걸 우리가 지역 공동체라 그래요. 같은 지역에 사는 지역 공동체를 결속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뭡니까? 혈연공변체는 수직입니다. 위에서 밑으로 내고 지형공변체는 평등이래요. 그리고 우리가 천을 짤 때 씨줄 날 줄과 같은 똑같은 그런 식으로 마을이 씨줄 날 줄같이 천이 딱 짜여져 있으니까 안 한 안 망가지는 거죠. 그걸 이제 딱 보고 일본 사람들이 겁을 낸 겁니다.
이어지는 민속신앙
그러나 우리의 민속신앙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민속신앙은 공간 속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월 대보름에는 오곡밥 부럼 등 특별한 음식을 함께하는데 안에도 민속신앙의 의미가 담겨 있다.
1700년도에 경도 잡지란 곳에 보면 옛날에 정말 대보름에 오곡밥을 여러 집 본인 집 말고 여러 집의 오곡밥을 얻어서 그걸 먹게 되면은 어 이렇게 얼굴이 검고 많은 아이들은 병을 치료할 수가 있다고 했고요. 또 점점 이렇게 봄이 되고 여름이 되면 풀벌레에 쏘이는 일이 많은데 그 오곡밥을 먹게 되면 풀벌레 쏘이는 일도 없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곡밥에 나물을 먹고 날밤 호두 은행 잣등을 어금니로 깨무는 풍속 부럼이다.
부롬 하면은 여러 가지 견과류 밤이나 호두 땅콩 잣 이런 걸 부롬이라 하는데 정말 대보름에 꼭 그걸 드신 이유는 부러움을 이렇게 하나 탁 깨물게 되면은 단단하잖아요. 치아가 탁 이렇게 튼튼해진다. 그렇게 또 조성들이 어른들이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또 그런 견과류에는 불포화지방산이 굉장히 많습니다. 겨울에 활동을 많이 덜 하고 이럴 때 그런 영양소 섭취도 좋고요.
좋은 기운이 가득하게 기원하는 정월 대보름의 민속으례들 마지막은 마을 주민들이 함께하는 달짓태우기다 나무더미를 쌓아 달집을 짓고 달이 떠오르면 불을 놓아 액을 막고 곡을 불러오는 재 초복을 기원한다. 그렇게 달집이 타오르면 연을 함께 날리는데 근래에는 풍등을 날리는 곳이 많아졌다 풍등에 소원을 적어 하늘에 닿기를 바라며 마음도 함께 담는다
그 속에는 반드시 대나무를 넣습니다. 대나무가 불이 붙었다면 마디가 터질 때는 탁탁 소리가 나죠. 그런 소리를 내어서 잡귀를 쫓아버리고 올해도 달집이 부르륵 막 아주 잘 타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연기가 산으로 벌어갔는데 그런 식으로 농사도 잘 되어서 풍년 농사를 기원하는 것이 세월이 바뀌고 사는 모습이 달라지면서 민속신앙은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미신이라고 터부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의 민속 신앙은 개인은 물론 마을 전체의 무사 안녕을 바라는 홍익인 간의 윤리 의식이자 전통이었고 우리의 생활 모습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는 문화인 것이다. 한 사회에서 문화라고 하는 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만든 하나의 공통된 언어이자 행위가 아닐까 싶은데요. 그렇게 생각을 해본다면 우리의 부모로부터 그리고 부모의 부모로부터 각 가정에 그리고 마을로 함께 이어받은 우리의 민속신앙 역시도 우리가 지키고 보존해 나가야 할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속신앙
내쫓긴 무당들은 성 밖에 무당집단 내지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종교활동을 이어갔다 현재 서빙고 왕십리 국파발 남산에 무라고 하는 전통 종교의 신봉자 계층이 왕실과 민중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에 걸쳐 이루어져 있었기 의학의 발달이 부진하였던 당시 특히 전염병이 났을 때 치병의 기능을 가진 무당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파발 금성당에 많은 공분을 헌납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로 보아서 이거는 중앙 정부 조선 시대의 궁에서 바로 이게 공문 제공하고 금성당이 건립되는데 많은 재정적 지원을 했다고 우리가 보는 것이죠. 결국 나라에서도 무속 신앙을 철저히 배제하진 못했고 무당들을 쫓아내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속 신앙을 지원하게 됐다. 서울 은평구에 있는 금성당이 조선시대 이러한 모순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1880년대 초반 건립한 것으로 금성대군의 영혼을 위무하려고 세운 굿 땅인 조선시대 궁에서도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민속신앙이 이어져 왔던 것이다. 이 금성당은 금성대군을 주신으로 모시는 굿당입니다. 금성대군은 세종의 셋째, 아들이고 또 세조의 아우이십니다. 금성대군께서는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시다가 젊은 나이 31살의 나이 세조에게 차명을 당합니다. 그래서 그의 금성대군을 기리기 위해서 이곳을 세우게 되었습니다.